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 저자
-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 출판사
- 민음사 | 2011-09-23 출간
- 카테고리
- 인문
- 책소개
- 우리가 즐겨먹는 ‘육식’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밝히다!『동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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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 중에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려고 할까?
'미각'을 위해서 불편한 진실은 알고도 모른척 넘어간다.
우리들의 미각을 위해서..
동물들이 고통속에서 학살당하고 있고,
지구는 더러워지고 띄거워 지고 있고,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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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먹음으로써 문자 그대로 동물을 망각하는 것 이외에도 동물과 망각 사이에는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카프카가 보기에 동물의 몸에는 우리들 안에서 우리가 잊고 싶어 하는 모든 부분들에 대한 망각이 덧씌워져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 중 어떤 부분을 부인하고 싶을 때는 그것을 ‘동물적 본성’이라 부르면 된다. 그러면 그 본성이 억눌리거나 감추어진다. 하지만 카프카가 대다수 사람들보다 더 잘 알았듯이, 우리는 가끔씩 정신이 들 때면 우리도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이 옳은 생각인 듯하다. 우리는 말하자면 물고기 앞에서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지는 않는다. 우리는 물고기를 보며 우리 자신의 일부(등뼈, 통각수용기,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엔돌핀, 고통에 대한 온갖 낯익은 반응들.)를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이러한 동물적 유사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그 결과 우리 인간성의 중요한 일부를 마찬가지로 부인한다. 우리가 동물에 대해 잊어버린 것을,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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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아지 고기처럼, 어떤 단어들은 우리가 실제로 말하는 것이 뭔지 잊도록 도와준다. 방목과 같은 단어들은 양심상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 행복과 같은 단어들은 그것들이 주는 이미지와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스럽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동물 간 경계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문화권에 다 동물이라는 개념 범주나 그에 상응하는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견에는 영어의 동물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사전상 정의로 보아도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니다. 첫 번째의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 왕국의 일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심코 동물이라는 단어를 오랑우탄에서 개, 새우까지, 인간만을 제외하고 모든 생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는 경우가 더 많다. 한 문화권 안에서, 심지어는 한 가족 안에서도 사람들은 동물이 무엇인지를 저마다 다르게 이해한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도 여러 가지 다른 식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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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공장식 축산 동물 제품을 규칙적으로 먹는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본래 의미와 분리하지 않고서는 환경보호주의자라고 자처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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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식량 특사는 10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주리는 마당에 수억 톤의 곡물과 옥수수를 에탄올에 쏟아 붓는 것은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14억 인구를 충분히 먹고도 남을 7억 5600만 톤의 곡물과 옥수수를 해마다 사용하는 축산업은 범죄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 7억 5600만 톤에는 전 세계 콩 생산량 2억 2500만 톤 중 98%를 농장 동물을 먹이는 데 사용한다는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도 않아요. 니만 목장에서 나온 고기만을 먹는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효율성을 지지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는 당치도 않게 식량 가격을 올리는 겁니다. 환경세나 동물 복지까지 따지지 않아도, 제일 먼저 고기를 그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이 비효율성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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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뭘 먹을지 결정하기 전에 요리에 대한 취향이 얼마나 파괴적이어야 할까? 비참한 삶을 살다가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는 수십억 마리 동물들의 고통에 한몫한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럼 대체 뭐가 대수라는 것인가? 지구가 대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지구온난화)를 거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 양심의 문제를 치워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면, 그래서 지금은 말고라고 말한다면, 그럼 언제라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문화가 소수자들을 사회의 이류 구성원으로 떨어뜨리고, 여자들을 남자들의 지배 밑에 두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공장식 축산업이 농업을 대체하도록 놔두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식으로 동물들을 다룬다. 동의의 신화는 아마도 바로 고기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현실적이라면, 이 이야기가 그럴듯한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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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 패티와 채식주의 버거 중에서 무엇을 주문하느냐가 심각하게 중요한 결정이라고 한다면 철딱서니 없는 소리로 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다시 말해 보건대, 1950년대에는 식당이나 버스에서 어디에 앉느냐가 인종 문제를 근절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1970년대 초, 세사르 차베스의 노동자 권리 운동 이전에 포도를 먹지 않는 것이 농장 노동자들을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구해 주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면, 똑같이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잘 들여다본다면, 매일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의 초기 정착민들이 보스턴에서 티 파티를 열기로 결정했을 때, 한 국가를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한 힘이 분출되었다. 무엇을 먹을지 (그리고 무엇은 배 밖으로 내던질지) 결정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형성하는 생간과 소비에 대한 근본적 행동이다. 채식이냐 육식이냐, 공장식 축산이냐 가족농이냐를 선택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들, 우리 아이들, 우리의 지역 공동체, 그리고 우리나라에 편의보다 양심을 선택하도록 가르쳐 줌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가치에 따라 살거나 혹은 가치를 저버릴 가장 큰 기회들 중 하나는 우리가 접시에 어떤 음식을 놓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국가로서 우리의 가치를 따라 살거나 혹은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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